《가오고략》은 조선 후기 문인이었던 귤산 이유원의 시문집으로, 19세기 조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총 20책의 문집 안에는 작가의 시와 산문뿐 아니라 중국 문인들과 정치적 목적으로 주고받았던 편지들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철종․고종 연간의 고위 관료로서 1882년 조선의 문화를 외국에 개방한 제물포조약의 전권대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의 활발한 연구를 통해 그가 19세기 조선의 문학과 금석․서예에 상당한 비중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며, 특히 《임하필기》의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등을 통해 국조 문헌에 해박한 식견을 지닌 탁월한 저술가로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그는 다방면에 풍부한 지식을 가진 박학한 학자였고 시인으로서도 빼어난 자질을 발휘하여 많은 시를 남겼으며 문장에도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예서에 빼어난 솜씨를 보였고, 겸하여 금석학(金石學)에 대한 기호가 있었다. 적지 않은 골동서화의 수장과 감상으로 19세기 경화사족(京華士族)의 면모를 특징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한 그의 학문적․문학적 업적은 바로 이 《가오고략(嘉梧藁略)》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1814년(순조14)~1888(고종25).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橘山)․묵농(默農),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9세손으로, 백사 이래 이태좌(李台佐)․이광좌(李光佐)․이종성(李宗城)․이경일(李敬一) 등의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이다. 부친은 이조 판서를 지낸 이계조(李啓朝)이다.
1841년(헌종7) 문과에 급제하였고, 32세 때인 1845년(헌종11) 10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의주 부윤, 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초에 좌의정에 올랐다가 1865년(고종2) 이후 한동안 정계에서 물러나 남양주 천마산(天摩山) 아래 가오곡(嘉梧谷)에서 지냈다. 1873년(고종10) 흥선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영의정으로 정계에 복귀하였다. 1875년(고종12) 순종의 왕세자 책봉을 주청하기 위한 진주 겸 주청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9년(고종16) 8월 말 이홍장으로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양 제국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는 권유 편지를 받았으나, 미국과의 수교 권유는 거부했다. 1882년(고종19) 7월에 전권대신 자격으로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유원은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자하(紫霞) 신위(申緯)에게 시를 배운 당대의 시인이었다. 특히 조선의 악부시(樂府詩)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이를 창작으로 드러내었다. 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예서(隸書)를 논한 서예가이며, 금석 서화와 원예․골동은 물론 국고 전장에 상당한 식견을 보여준 19세기의 비중 있는 학자이자 예술가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나아가 연행과 이후 서신을 통해 섭지선(葉志詵) 등 당대 중국의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청대의 학풍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이러한 학문적․예술적 성과가 그의 저술 《임하필기(林下筆記)》․《가오고략(嘉梧藁略)》․《귤산문고(橘山文稿)》에 담겨 있다. 또 국가경영에 관계된 저술로 《체론유편(體論類編)》과 《국조모훈(國朝謨訓)》이 있으며, 아울러 《경주이씨금석록(慶州李氏金石錄)》과 《경주이씨파보(慶州李氏派譜)》 등도 편찬하였다.
1967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에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거점번역연구팀에서 2010년부터 2020년까지 번역을 수행하였고, 현재 경운초당에서 초서를 가르치고 있다. 박사학위논문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연구〉이고, 번역서로 《무명자집 5․6․13․14》, 《환재집 1․2》, 《풍고집 2》가 있으며, 공역서로 《김광국의 석농화원》, 《석견루시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