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풍수집의(실학번역총서 08)

  • 사람의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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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도서
    • 실시학사 실학번역총서
  • 정약용 지음
  • 박종천역자
출간일 2015-10-20
ISBN 979-11-5550-115-3 94150
면수/판형 신국판(152 X 225)·248쪽
가격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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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작가소개 목차 미디어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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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이 제시한, 유교적 장례의 대안


    조선 후기에 성행하던 풍수지리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산송(山訟)의 폐해를 바로잡아 합리적인 유교적 장례(葬禮)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다산 정약용이 편술한 『풍수집의(風水集議)』 전문을 현대어 옮기고. 주해를 단 책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풍수지리설에 대한 신봉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매장 문화 전면에 유교적 가치를 외면한 채 기복적(祈福的) 욕망을 추구하는 풍속이 만연해졌고, 이는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되기 일쑤였다. 이에 다산은 당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선유(先儒)들의 풍수론 28가지를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설명을 각각의 ‘안’(案) 형식으로 덧붙인 뒤, 자신만의 풍수론인 「사암풍수론(俟菴風水論)」을 합쳐 이 책을 완성한다. 이른바 역대 중국의 유교적 풍수비판론을 집대성하고, 독창적 시각의 풍수론을 제시한 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효’(孝)로 포장된 기복적(祈福的) 욕망의 온상이었던 풍수지리설
    조선 후기 구타ㆍ살인 사건의 절반에 이르는 산송(山訟, 묏자리 분쟁) 일으켜


    조선 후기 최대의 법적 분쟁은 산송(山訟)이었다. 풍수지리설은 조상의 무덤을 더 좋은 곳에 모셔서 그 음덕을 누리려는, 비합리적이고 기복적인 욕망들이 부딪히는 사회적 갈등을 극도로 조장했다. 몇 십 년에 걸쳐 송사에 휘말리거나 몇 세대에 걸쳐 집안끼리 앙숙으로 지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좋은 땅에 대한 집안 간 소유권 분쟁은 물론, 여러 번 되풀이되는 잦은 이장(移葬), 남의 무덤에 몰래 부모의 시체를 묻는 투장(偸葬), 길지를 찾느라 몇 개월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상황까지 연출된 것은 모두 명당에 대한 집착이 그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다산은 『풍수집의』에서 “근세의 이름난 가문 중에는 그 조상의 무덤을 일곱 번이나 파낸 경우도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그의 외가인 해남 윤씨 가문에서 공재 윤두서의 무덤을 일곱 번 이장하면서 사회적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분쟁이 격심해지면서 폭력이 난무하고 심지어 사람이 죽어나가는 경우도 빈번했다. 다산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이러한 사회적 풍토를 개탄하며, 당시 구타 및 살인 사건의 절반이 산송 때문에 일어날 정도로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산송은 ‘효’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입신출세와 가문의 번창이라는 욕망을 성취하려는 술수로서, 풍수지리설을 지나치게 신봉했던 문화적 풍토에서 빚어진 사회적 비극이었다.

     


    합리적 풍수비판론의 집대성과 조선 후기 산송의 해법 제시


    다산은 당시 만연했던 풍수지리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이익이나 복(福)을 구하는 자세가 아니라 효자의 올바른 마음으로 합리적인 장례를 치를 것을 역설하면서, 풍수지리설에서 기인해 사회적 문제로 비화된 산송의 폐해를 바로잡아 합리적인 유교적 장례(葬禮)의 대안을 제시했다. 『풍수집의』는 바로 이러한 그의 사유와 실천이 농축된 저술이다.

     


    ㆍ 역대 유교적 풍수비판론의 집대성: 효자의 마음과 합리적 판단


    다산은 『풍수집의』에 당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선유(先儒)들의 풍수론 28가지가 수록된, 청나라 서건학(徐乾學, 1631~1694)의 『독례통고(讀禮通考)』 권83 「장고2(葬考二)」에서 중요한 대목을 발췌하여 본문으로 싣고, 거기에 자신의 설명을 각각의 ‘안’(案) 형식으로 덧붙인 뒤, 자신만의 풍수론인 「사암풍수론(俟菴風水論)」을 합친다. 『독례통고』 「장고」는 기복적 욕망에 대한 합리적 비판의식의 차원에서 이규경, 박제가 등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풍수비판론의 기본적인 텍스트로 인정받았으나, 이에 대한 주석과 함께 독자적인 풍수비판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정약용의 『풍수집의』가 유일하다.


    다산은 『풍수집의』에서 역대의 유교적 풍수비판론을 계승 발전시켜, 효자의 정(情)을 온전하게 실천함으로써 예의의 자세를 다하되, ‘인사(人事)의 편의’를 고려하는 실학적 관점을 선보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간이나 방위의 길흉을 따지지 않고 ‘신종(愼終)의 예(禮)’를 다하는 자세를 보여준 당나라 여재, 음양과 금기를 따지는 세태의 비합리성을 극복하고 인사의 편의를 고려한 북송의 사마광, 동기감응(同氣感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길흉화복과 연관된 풍수의 기복적 논리를 철저하게 비판하며 ‘흙이 윤택하고 초목이 무성한 곳’을 좋은 자연적 조건으로 보는 한편, 무덤터로 길거리, 성곽, 웅덩이, 연못, 권세 있는 자에게 빼앗기는 곳, 농사짓는 곳 등을 피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송나라 정이천, 조상을 편안한 곳에 모시려는 자손의 효도와 정성스런 자세를 강조한 주자 등 다양한 유교적 풍수비판론들을 담아낸다.

     


    ㆍ 풍수지리설에 대한 다산의 합리적 진단과 실학적 비판


    다산은 『풍수집의』에서 사람들의 비합리적 믿음과 기복적 욕망을 자극하여 욕심을 채우는 지사(地師)들의 사회적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또한 실제로 땅을 파보면 지사들의 설명이 그럴싸하게 맞는 경험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기록했던 마술사들의 환술(幻術) 또는 신들린 자의 현상과 비슷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풍수지리설이 효력을 증명하는 경험적 사실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그 현상에 대한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이해였다.
    나아가 다산은 풍수지리설이 맞는다면 지사들의 후손들이 잘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정반대라는 점을 지적했다. 예컨대, 풍수지리설의 비조인 곽박이 죄 없이 죽음을 당하여 시체가 물속에 수장된 사례, 한국 풍수의 비조인 도선과 무학, 조선 후기의 이의신과 담종 등의 지사들은 절손(絶孫)되거나 후손이 있어도 변변한 인간 구실을 못했다는 점을 든다.

     


    ㆍ 합리적ㆍ윤리적 장례와 족장법의 실천: 사마광, 정자, 이원익, 이식, 정약용


    한편, 다산은 풍수지리설을 거부하고 합리적으로 장례를 치른 명문 가문들은 별다른 술수나 처방 없이도 대대로 장수와 명예를 누렸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다산은 지사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 합리적인 장례를 치렀던 북송의 사마광 집안과 남송의 정자(程子) 집안의 사례를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조선에서는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집안과 택당(澤堂) 이식(李植) 집안에서 행한 족장(族葬)을 칭송하면서, 이 집안들이 풍수지리를 따르지 않았으나 대대로 장수하고 영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렇게 다산은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풍수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정신에 따라 장례를 치를 것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그런 이상을 몸소 실천에 옮겼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 의하면, 다산은 자신이 죽은 뒤 무덤을 쓸 때 지사에게 묻지 말고 가원(家園)에 묻으라고 유언을 남겼으며, 실제로 그에 따라 경기도 마재에 위치한 생가 뒷산에 묻혔다.

     


    ㆍ 풍수지리설에서 비롯된 사회 문제의 합리적 해결책 제시
       ―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풍수설에서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족장법(族葬法)으로


    『풍수집의』에서 집대성된 ‘유교적 풍수비판론’은 대체로 풍수를 통해 불거지는 기복적 욕망과 비합리적 믿음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자손들의 효성스런 마음가짐을 강조하면서 합리적 관점을 전개하거나 유교적 예법을 따를 것을 역설한다. 실제로 다산은 역대 선유들의 풍수론을 계승하면서 용맥과 형세에 따른 길흉, 음양장법(陰陽葬法)과 오성설(五姓說), 시간과 좌향에 따른 길흉, 귀신이나 신살로 인한 금기, 방분(房分)에 따른 길흉 등 기문둔갑, 육임, 음양장법 등에서 비롯된 각종 풍수지리설들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또한 택일(擇日), 택지(擇地), 이장(移葬) 등의 문제를 일으킨 지사들을 거짓된 말로 사기 치는 협잡꾼에 불과한 장무(葬巫)라며 무당과 비슷하게 보면서 비판했다. 특히 지사들이 부모님을 평안하고 좋은 곳에 안장하고 싶은 효자의 마음을 나쁘게 이용해 오랫동안 장사를 치르지 못하게 하는 문제점을 극복한 선유들의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평가했으며, 남의 무덤을 빼앗기 위해 저질러지는 각종의 작태들이 산송을 일으키는 사례들을 비판적으로 다뤘다.


    다산은 법전에 대한 오해와 효행으로 포장된 사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지사들의 활동이 산송의 원인이라고 진단하며, 『주례(周禮)』에서 제시하는 유교적 장례법인 족장법을 합리적인 대안으로 소개했다. 족장법은 장사를 지낼 땅의 형세나 좌향 등과 무관하게 오직 소목(昭穆: 조상의 항렬 순서)에 따라 자리를 배치하는 장례법이다. 나아가 다산은 이를 토대로 풍수지리설에 따른 산송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역서’(掌域署)를 전담부서로 제안(『경세유표』 제2권, 「추관형조(秋官刑曹)ㆍ형관지속(刑官之屬)」)하는 한편, 무덤은 본래 백성들이 사적으로 점유하지 않고 국가가 공적으로 담당하여 관리했다는 점을 역설(『경세유표』 제8권, 「지관수제(地官修制)ㆍ전제(田制)11」)하기도 했다. 『풍수집의』는 다산의 이러한 주의와 주장이 포괄적으로 서술된 실천적 비판서라고 할 수 있다.


    대선이나 총선에 즈음해 출세를 위해선 조상의 무덤까지 옮기고,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선 그 어떤 술수도 마다하지 않는 흐름이 잔존하는 오늘날, 어언 2백 년 전 다산이 『풍수집의』에서 보여준 치밀한 사회적 진단과 처방이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  책 속에서 |


    ㆍ 풍수설(風水說)은 세상에서 흔히 신봉하여 덕의(德義)를 닦지 않고 장무(葬巫)에게 복(福)을 구하는데, 관습과 풍속이 이미 고질화되어 미혹된 사람들을 깨우칠 수가 없다. 이 글은 옛 사람의 유명한 논설을 모은 것으로, 이런 설, 저런 설을 나란히 실어서 잘잘못을 드러내고, 사이사이에 어리석은 내 견해를 덧붙여서 그 분명하지 않은 부분을 밝혔다. 아마도 선(善)을 좋아하고 사리(事理)를 안다면, 이 책을 대하고서 풍수의 허망함을 깨닫고, 그로 인해 그 폐해를 줄이게 될 것이다. 차라리 믿지 않을지언정, 그 때문에 내게 죄주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본문 25쪽, ‘풍수집의 서문’ 중에서 ■


    ㆍ 그 묏자리를 점치는 것은 그 땅이 좋은 지 나쁜 지를 점치는 것이지, 음양가(陰陽家)가 말하는 화복(禍福)이란 것이 아니다. 땅이 좋은 경우에는 그 신령(神靈)이 평안하고 그 자손들도 번성하여, 마치 그 뿌리를 북돋우면 가지가 무성해지는 것과 같으니, 이치가 본래 그런 것이다. 땅이 나쁜 경우에는 이와 반대다. 그렇다면 땅이 좋은 경우는 무엇을 말하는가? 흙의 색깔이 빛나고 윤택하며 초목(草木)이 무성한 것이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부자(父子)와 조손(祖孫)은 기(氣)가 같으므로, 저쪽이 편안하면 이쪽이 편안해지고, 저쪽이 위태로우면 이쪽도 위태로운 것도 역시 그 이치인 것이다.
    ― 생각건대, 저쪽이 편안해야 이쪽이 편안해진다는 이치는 본래 군자가 사모하는 지극한 뜻이다. 만약 살아있을 때에 의거하여 말하자면, 부모님은 복된 땅에 거주하여 건강하고 평안하게 지냈어도 자손이 요절(夭折)하는 경우가 있으며, 부조(父祖)가 나쁜 섬에서 유배되어 몹시 고생하며 궁핍하여 시름겨운데도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가 장차 경상(卿相)이나 대관(大官)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물며 자신이 죽은 뒤에는 무엇으로써 그 필연(必然)의 응(應)을 유지하겠는가?
    |본문 48~49쪽, ‘풍수집의 권1’ 중에서 ■

     

    ㆍ 옛 사람들이 이른바 ‘그 묏자리를 점친다’고 한 것은 바로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의 마음으로 유체(遺體)를 소중하고 살갑게 여겨서, 언젠가 성읍, 길거리, 도랑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곽박의 설에 미혹되어 길지를 탐하고 구하지만, 몇 년 동안이나 그 어버이를 장사지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미 장사지냈으나 불길하여 한 번 파내는 데 그치지 않고 세 번 파내고 네 번 파내는 자도 있으며, 땅을 사는 문제로 송사를 벌여서 관이 아직 땅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집안이 이미 쓸쓸해지는 경우도 있고, 형제 몇 사람이 저마다 따로 풍수설에 미혹되어 골육(骨肉)끼리 서로 원수가 되어버리는 경우까지도 있는데, 듣지 못했다고 말하겠는가? “용혈(龍穴)은 멀지 아니하나, 그저 사방 한 치의 땅을 갈무리할 뿐이요, 우면(牛眠)은 가까이 있으나, 산마루 구름 덮인 곳까지 답파(踏破)해도 헛수고일세.”
    ― 생각건대, 근세의 이름난 가문 중에는 그 조상의 무덤을 일곱 번이나 파낸 경우도 있다. 그 뒤로는 문호(門戶)가 나날이 점차 병들어 시들어가고, 자손은 나날이 점차 드물어지며, 재앙과 변고는 마구 생겨나지만, 아무도 치료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부터 살펴보건대, 풍수의 미혹은 하늘이 깊이 미워하는 것이다.
    |본문 151~152쪽, ‘풍수집의 권3’ 중에서 ■

     

    ㆍ 근세의 사대부들은 풍수를 지나치게 신봉했다. 내가 한 고인(故人)을 문한한 적이 있었는데, 감여가들이 자리에 가득했다. 내가 말했다. “근래에 상제(上帝)께서는 무척이나 바쁘십니다.” 고인(故人)이 재빨리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말했다. “인간의 빈부(貧富)와 수요(壽夭)가 번거로이 지사(地師)의 발꿈치를 좇아서 구르고 있으니, 상제께서 어찌 바쁘시지 않겠습니까?”
    ― 생각건대, 근세의 재상(宰相)과 조사(朝士)들이 향서(鄕墅: 시골 별장)에 나가 노닐 때면, 반드시 지사(地師) 서너 명이 뒤를 따르는데, 많은 경우에는 대여섯 사람이 오락가락하면서 그칠 때가 없었다. 만약 이 마음을 옮겨서 어진 선비를 사랑하고 친척들을 돈독하게 대하면, 틀림없이 나라에는 충성하고 집안에서는 화목할 것이다.
    |본문 162~163쪽, ‘풍수집의 권3’ 중에서 ■

     

    ㆍ 어버이를 장사지내는 자가 풍수를 지나치게 맹신하면, 남의 산을 침범하여 점유하거나 남의 무덤을 파서 남의 조상 해골을 내버리기까지 하여, 원한이 잇달아 송사(訟事)가 얽혀서 죽음을 각오하고 이기기를 구하다가, 집안이 기울어지고 가업을 망치는 데까지 이르고도 땅을 끝내 얻지 못해서 복을 받기는커녕 화가 당장 닥치게 되니, 어찌하여 그 어리석음이 한결같이 이런 지경에 이르는 것인가?
    ― 생각건대, 일세(一世)를 가득 채운 자들이 모두 산을 찾아다니며 산송(山訟)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니, 아! 도대체 어찌하겠는가?
    |본문 165~166쪽, ‘풍수집의 권3’ 중에서 ■

     

    ㆍ ― 우리나라 선배들, 이를테면 오리(梧里) 이정승(李政丞, 李元翼)이나 택당(澤堂) 이학사(李學士, 李植)같은 분들도 모두 풍수를 준엄하게 물리쳤다. 오리의 선영은 금천현(衿川縣)에 있는데, 족장(族葬)이다. 상(喪)이 나도 새로운 묏자리를 찾지 않았지만, 그 집안은 대대로 장수하면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택당의 자손들도 영달하고 숭고하여 지금까지도 쇠락하지 않았으며, 그 유훈(遺訓)은 지극한 이치와 눈 밝은 논의가 많았으니, 가려내서 이 사이에 넣는 것이 마땅하다.
    |본문 172쪽, ‘풍수집의 권3’ 중에서 ■

     

    ㆍ ― 곽박은 죄 없이 죽임을 당하여 시체가 물속에 수장되었고, 도선(道詵, 827~898)과 무학(無學, 1327~1405) 등은 모두 몸소 머리 깎고 중이 되어 그 종사(宗祀)를 무너뜨렸으며, 이의신(李義信)과 담종(湛宗)은 핏줄을 이을 자손이 없었다. 요즘 거침없이 말하는 자들도 모두 죽을 때까지 빌어먹고 그 자손들은 창성하지 못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이치인가? 지사의 아들이나 손자로서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나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가 된 자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 인정(人情)은 마찬가지인데, 내게 발복(發福)할 수 있는 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한 꿰미의 돈에 파느라고 가벼이 남에게 건네줄 자가 있겠는가? 재상(宰相)으로서 풍수술(風水術)에 미혹되어 그 부모님의 무덤을 여러 번 옮긴 자는 자손이 없는 경우가 많고, 사서인(士庶人)으로서 풍수술에 미혹되어 그 부모님의 무덤을 여러 번 옮긴 자는 기이한 화를 입거나 괴이한 변을 당한 경우가 많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은 지사에게 뇌물을 주어 자기의 뜻을 따르게 했지만, 형제가 장수하면서 영화롭고 존귀하게 살았거늘, 어찌 깨닫지 못하는가? 환히 통달한 논의를 한다는 자가 말했다. “풍수의 이치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아아! 논쟁의 판결이 이런 식이라면, 아무래도 선비 노릇하기도 어렵지 않겠는가?
    |본문 180-181쪽, ‘풍수집의 권3, 「사암풍수론(俟菴風水論)」’ 중에서 ■


     


  • 책소개 작가소개 목차 미디어서평
  • 정약용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 1762(영조 38)년에 태어나 1836(헌종 2)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귀농(歸農),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 사암(俟菴), 탁옹(?翁), 태수(苔?),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시호는 문도(文度)다. 조선 후기 근기 남인 명문가 출신으로, 정조(正祖)의 총애 속에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역임하면서 정조의 개혁 정치에 적극 참여했으나, 1801년 발생한 천주교의 신유교난(辛酉敎難) 이후에는 장기, 강진 등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와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의 경세학을 포함해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박종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교수

  • 책소개 작가소개 목차 미디어서평
  •  간행사: 실학번역총서를 펴내며
    해제 

     


    Ⅰ. 『풍수집의(風水集議)』 권1


    1. 풍수집의 서문
    2. 여재(呂才)의 「장서서(葬書敍)」
    3. 사마광(司馬光)의 「장론(葬論)」
    4. 정이천(程伊川)의 「장론(葬論)」
    5. 장횡거(張橫渠)의 「장론(葬論)」
    6. 주회암(朱晦菴)의 「장설(葬說)」
    7. 진부량(陳傅良)의 「주공향묘지(朱公向墓誌)」
    8. 장구성(張九成)의 「제분원신문(祭墳園神文)」
    9. 진덕수(眞德秀)의 『독서기(讀書記)』
    10. 나대경(羅大經)의 『학림옥로(鶴林玉露)』
    11. 웅붕래(熊朋來)의 「장론(葬論)」

     


    Ⅱ. 『풍수집의(風水集議)』 권2


    1. 오초려(吳草廬)의 「장론(葬論)」
    2. 조방(趙?)의 『장서문대(葬書問對)』
    3. 방효유(方孝孺)의 「장론(葬論)」
    4. 구준(丘濬)의 「장론(葬論)」
    5. 도목(都穆)의 「장론(葬論)」
    6. 왕정상(王廷相)의 「장론(葬論)」
    7. 황성증(黃省曾)의 「난묘유길흉론(難墓有吉凶論)」
    8. 「수동선훈(守潼宣訓)」
    9. 왕조운(王兆雲)의 『설포식여(說圃識餘)』
    10. 여곤(呂坤)의 『사례의(四禮疑)』
    11. 진용정(陳龍正)의 「장론(葬論)」
    12. 시소병(柴紹炳)의 「원장론(原葬論)」
    13. 주동상(朱董祥)의 「논장서(論葬書)」

     


    Ⅲ. 『풍수집의(風水集議)』 권3


    1. 장식(張?)의 「제증지리권후(題贈地理卷後)」
    2. 호한(胡翰)의 「풍수문답서(風水問答序)」
    3. 송렴(宋濂)의 「자효암기(慈孝菴記)」
    4. 고미(顧湄)의 『지문록(咫聞錄)』
    5. 정한봉(鄭漢奉)의 『경지수언(徑地粹言)』
    6. 사암풍수론(俟菴風水論)

     


     부록


    『풍수집의(風水集議)』 권1 원문
    『풍수집의(風水集議)』 권2 원문
    『풍수집의(風水集議)』 권3 원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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