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와의 만남 그리고 엇갈림, 수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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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고전의 풍경
  • 노이점 지음
  • 김동석역자
출간일 2015-07-31
ISBN 979-11-5550-114-6 03810
면수/판형 신국판(152 X 225)·560쪽
가격 3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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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작가소개 목차 미디어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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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조선 후기 문신인 추산楸山 노이점(盧以漸, 1720~1788)이 쓴 중국 기행문(연행록)을 완역한 것이다. 그는 『열하일기』의 연암 박지원과 그 연행길을 함께했던 인물로, 박지원에 비겨 모든 면에서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청나라의 수도에 행차를 하면서도 여전히 배청숭명背淸崇明과 북벌의 사대사상에 젖어 있었으며, 여행 내내 만주식 변발을 한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을 거두지 못했다. 사실 당시 사행단의 분위기는 대체로 이러한 시대 인식을 가진 이들이 주도하고 있었으며, 이를 고려한다면 당시 북학 사상의 성장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인식과 태도는 북경에 당도해서 조금씩 바뀌어 간다. 북경 사람들의 교양에 감동하기도 했고, 청나라의 제도에 감탄하기도 했다. 우리는 책에서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이점과 박지원은 북경에 다녀오는 동안 여정을 함께했기 때문에, 어쩌면 『수사록』의 모든 내용은 『열하일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공간에 있기도 하고, 또 다른 공간에 있기도 하면서 두 나그네는 18세기 연행의 풍경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어 낸다. 요컨대 우리는 『열하일기』의 여백을 다른 각도에서 채워 내는 소중한 자료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 셈이다.

     

     

    『수사록』이란 무엇인가


    저자 노이점은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70세 생일을 맞이해 조선에서 보낸 사절단인 ‘사은겸진하사행謝恩兼進賀使行’의 일원으로 북경에 다녀온다. 모두가 아는 바처럼 같은 사행단의 일원이었던 연암 박지원은 이 사행의 기록을 역작 『열하일기』로 풀어낸다.


    『수사록隨?錄』이란 제목은 이 연행록이 세상에 처음 소개될 때부터 관심을 끌어온 것으로, ‘사?’는 본래 『해사록海?錄』의 용례에서도 보이듯이 뗏목을 타고 바다를 통해 간 사신의 기록에 많이 사용됐다. 육로를 통해 명나라로 사행을 가서 지은 시문을 기록한 『동사록東?錄』의 경우와 같이 육로를 통한 사행에도 ‘사’자를 붙이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두보의 시 「추흥팔수秋興八首」에도 ‘봉사허수팔월사奉使虛隨八月?’라는 구절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육로 사행이라는 의미로 ‘사’자를 썼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시재詩才로 유명했던 노이점이 이를 차용하여 쓴 듯하다.


    동일한 사행 체험을 바탕에 두고 있기에, 『수사록』의 가치는 『열하일기』와 대비시킬 때 오롯이 드러난다. 특히 『열하일기』가 놓친 것을 보충하거나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열하일기』에는 북경에서 한양까지 돌아오는 과정과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과정이 생략된 데 반해, 『수사록』에는 사행의 전 경로가 성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열하일기』가 놓치고 있는 구체적인 노정의 복원과 고증이 가능해진다.

     


    그대는 봄꽃, 나는 가을 열매


    또한 노이점은 상방비장上房裨將(사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 벼슬)의 신분으로 연암과 함께 연행을 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세계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래선지 같은 체험에 대해서도 다르거나 아예 상반된 입장에서 기록을 남긴다. 알다시피 박지원은 사대론과 북벌론을 극복해야 한다는 북학파의 선구였지만, 노이점은 여전히 배청숭명의 사대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둘은 타고난 기질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였다. 밤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저잣거리를 활보하거나 사행단의 공식 루트를 벗어나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던 정력가 박지원과 달리, 노이점은 제3자의 시각으로 볼 때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타고난 본성도 차분한 사람”이었다. 예컨대 노이점과 박지원이 똑같이 만난 유명 인사 박명博明은, “박공朴公(연암 박지원)은 고명高明하고, 노군盧君(노이점)은 침잠沈潛한 사람이지요. 봄에 피는 꽃과 가을에 맺는 열매를 두 분이 각각 차지하고 있지요.”라고 말한다.


    이러한 차이는 노이점과 박지원이 중국 인사들을 만나 필담하는 과정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노이점의 경우엔, 박명과 필담을 나누면서 경전 구절과 역사적 인물, 지명 등과 관련해 자기 지식을 보여주고 그것을 확인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하지만 박지원은 지전地轉을 비롯해 티베트 불교, 청나라 통치술 등의 문제에 대해 활발한 필담을 나누고, 새로운 세계 인식과 문화 동향에 주목하면서 자기 사유와 인식의 지평을 보여주려 한다.
    이는 두 여행자가 행로를 공유했을 뿐 각자의 여행 체험과 그 결과가 상이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로써 당시 조선의 외교 사절단(구성)에 대한 입체적인 판단도 가능해진다.

     


    『열하일기』의 행간을 채우다

     


    ?상술하였듯이 『수사록』에서는 『열하일기』의 공백을 메우는 지점이 종종 발견된다. 특히 그것은 북학파 박지원의 실제 모습과 그의 북학관의 성장을 관찰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의미 있는 사료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열하일기』에는 박지원이 황해도를 지나며 지전설地轉說에 대해 구체적인 토론을 준비한 것과 열하의 태학관에서 만주족과 한족의 인사들과 필담하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박지원이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와 노이점을 포함한 조선사행원과 지전설에 대해 다시 논의했던 사실은 빠져 있다. 그런데 『수사록』을 보면, 이 토론의 상황과 저간의 사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날 박지원은 열하에서 중국인 왕민호를 만나 지전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전하며, 자신의 지전설 주장을 피력한다. 그의 주장은 동행한 조선사신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토론의 장소도 북경의 서관西館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제재를 받지 않는 파격적인 관점이 자유롭게 소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장에서 노이점은 주자가 주장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논리로 박지원의 주장에 반대했지만, “주장에 묘리가 있는 듯하다.”는 『수사록』 중의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역시 박지원의 논리적인 화술에 적지 않게 감동을 받은 듯하다.


    그는 이 토론에 대한 충격과 박지원에 대한 흠모의 표시로 그에게 「서관문답서西館問答序」(『수사록』 후미에 함께 실려 있다)를 써서 전해 준다. 다소 과장된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는 『열하일기』를 남긴 박지원의 실제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없이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수사록』은 『열하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보충을 위한 의미 있는 자료로서, 같은 시기 사행과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이자, 존화적 경향의 시각차와 당대 조선 지식인들의 대외 관계 인식을 조명하는 구체적인 사료가 된다.

     


    연행록 다시 보기, 『수사록』 깊이 읽기

     

    사실 『수사록』을 단독 작품으로 놓고 바라본다면, 다른 연행록들과 비교해 큰 특장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저자 노이점의 견문 부족, 배청숭명이라는 역사 인식의 한계는 여러 장면에서 굴절된 시각으로 표출되었다. 때문에 그의 시선에 청나라의 실상이 제대로 포착되었다고 쉬이 판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수사록』은 다른 연행록들이 지니지 못한 독특한 가치를 보유한다.


    먼저 『수사록』은 ‘충실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노이점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매일 성실하게 기록했다. 단순한 기행 체험인 경우에는 짧게 서술했지만, 사신 업무와 관련된 공식 행사는 물론, 북경에 체류하면서 명소를 방문하거나 예컨대 박명과 같은 유명 인사를 만나 필담을 나누는 등의 비중 있는 일에 대해서는 상세하고 길게 서술했다. 또한 기존의 연행록들이 주로 사대부 벼슬아치들 사이에서 창작됐던 것에 견주어, 『수사록』은 상방비장으로서, 사행에 참가한 정사나 부사를 수행한 중인中人의 북경 기행록이라는 점에서도 남다른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놓쳐서는 안 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노이점이 박지원을 관찰하여 남긴 기록들과 박지원이 도저히 남길 수 없는 내용을 다른 공간에서 묘사하고 기록한 것이다(덧붙여 이와 반대로 박지원이 노이점을 형상화해 『열하일기』에 기록한 것들은 『수사록』을 통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노이점과 박지원은 세계관에 있어서도 대비되는 면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로써 당시 사행단의 분위기도 짐작 가능하거니와, 좀 더 확산시켜 말한다면,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자신의 북학 사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로 삼은 것도, 사실 그가 노이점 등을 만나 이야기하던 중에 계발을 받아 더욱 소신을 가지고 의견을 개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컨대 『수사록』과 『열하일기』는 서로의 내용을 보충하고 안팎으로 짝을 이루면서 묘한 대비를 이루는 연행록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련성을 고려해, 이 책에서는 『수사록』과 『열하일기』의 기록이 서로 공유하는 일정에 대해, 『수사록』의 각 기사 후미에 해당 일자별로 『열하일기』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정리해 두었다. 아울러 1780년 저 연행의 노정을 현재적 시점에서 다시 좇으면서 옮긴이가 직접 찍어 수록한 현장 사진들도 독서의 효과를 배가시키거니와 당시 『수사록』의 노이점과 『열하일기』의 박지원의 여정이 엇갈렸던 요양성, 광녕성 부근의 모습도 고증을 통해 시각화한 지도로써 재현해 놓았다.  


     

    ■  책 속에서 |


    ㆍ 노이점과 박지원이 연행에 임한 가장 큰 목적은 중국의 인사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기서 독특한 차이를 보인다. 노이점은 학식이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 계주 교관 같은 사람에게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박지원은 야간의 금기까지 어기고 숙소를 빠져 나가 그곳 상인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다시 북경에서 유명 인사 박명博明을 만날 때, 노이점은 그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존경을 보이면서 글을 받으려 간절하게 애원했다. 그 결과 노이점은 박명과 깊이 있는 학문 세계 논의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때 박지원도 박명과 필담을 나눈 적은 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박지원은 열하에서 현달하지 못한 왕민호王民? 같은 인물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면서 장편의 글을 남긴다. 당시 왕민호는 거인擧人으로 성省에서 치르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 정도를 가진 사람이었다.
    ―본문 32~33쪽, ‘옮긴이 해제’ 중에서
     
    ㆍ 나는 중국 사람들 중에 풍수를 숭상하지 않는 사람이 많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풍수설은 실로 세상을 기만하고,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지금 이곳 양영윤은 그의 부친을 평지의 움푹 들어간 곳에 장례를 치렀지만, 그의 집은 풍족하고, 사람들은 재능이 있어 뛰어나고 걸출하다. 이것이 어찌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단 말인가?
    ―본문 117~118쪽, ‘강을 건너다’ 중에서


    ㆍ “올 때 들으니 책 읽는 소리가 아름다웠습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게 해 멀리서 온 사람에게 들려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좌우를 둘러 살펴보니, 어린아이 수십 명이 모두 옥 같은 얼굴과 지초 같은 눈썹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은 아이 한 명을 내 앞에 꿇어앉히고, 책을 읽게 한다. 『시경』의 「칠월」편인데, 책 읽는 소리는 우리나라와 매우 다르고 오히려 재미도 없다. 그러나 그 아이의 옥 같은 얼굴과 ‘눈썹’은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아이들 중에 가장 귀여운 아이 몇 명을 다시 불러서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만 변발한 것이 애석하다.
    ―본문 135~136쪽, ‘심양에서’ 중에서


    ㆍ 옹성甕城에 들어가고 나서, 또 다시 성문으로 들어간다. 문은 높이가 2층인데 황금빛과 푸른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전방과 시장은 번화하다. 사람들의 용모가 출중하며 재지才智가 뛰어나니, 심양보다 낫다. 비로소 중국의 정취가 난다. 성문 누각의 윗면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다섯 글자가 쓰여 있다. 일찍이 ‘이것이 이사李斯가 쓴 글씨’라고 들은 적은 있지만 지금 글자 획을 보니 예스럽지 못하고, 글씨체의 법도도 세속적이다. 결코 이사의 글씨가 아니다.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건륭의 글씨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글씨라고 하기도 한다.
    ―본문 185~186쪽, ‘산해관에 들다’ 중에서


    ㆍ 열하의 소식을 들어보니, 험준한 산봉우리를 여러 번 넘었고 길이 매우 험난했으며, 변방인데다 바람과 모래가 없는 날이 없고 달리 뛰어난 경치도 없으니,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고 한다. 건륭이 살고 있는 궁전은 ‘피서산장避暑山庄’이라는 편액을 썼고, 황금 기와로 덮었으며 궁 밖에는 약간의 암석이 있지만 기이하고 괴상하지는 않다고 한다. 새로이 지은 태학太學은 그 모습이 자못 매우 넓고 크며, 화려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아마도 지역이 멀리 떨어진 변방의 산골짜기에 있고, 몽고와도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듯하다고 한다. 원나라 때부터 행궁行宮을 건립해 두었는데 무엇 때문에 선택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고, 단지 사냥하기에는 좋다고 하지만 사치함은 당나라 때 옥화궁玉華宮보다 더하다고 한다.
    ―본문 286~287쪽, ‘북경 생활’ 중에서


    ㆍ “박공朴公(연암 박지원을 이른다)은 고명高明하고, 노군盧君(저자인 노이점을 이른다)은 침잠沈潛한 사람이지요. 봄에 피는 꽃과 가을에 맺는 열매를 두 분이 각각 차지하고 있지요.”
    ―본문 318쪽, ‘북경 생활’ 중에서


    ㆍ 나중에 들으니 거인擧人 왕민호王民?는 호가 곡정鵠渟으로 연암과 열하에서 서로 만났다고 한다. 부인이 남편을 바꾸지 않은 것을 논했는데, 중국에서는 금령이 매우 엄해 국가에서 그들의 부모까지 죄를 준다고 한다. 동남 지역은 더욱 심해 사대부 집안의 남녀가 어렸을 때 약혼을 했거나 혹 불행하게도 남자가 죽어 버리면, 여자도 또한 약을 먹거나, 혹은 스스로 목을 베고 죽어 합장하게 한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간혹 이것을 기롱譏弄해 시분尸奔과 절음節淫이라고 한다. 정말로 괴상하다.
    ―본문 352쪽, ‘북경 생활’ 중에서


    ㆍ 중화의 선비들로서 학문과 문장이 있는 사람들도 연암을 한번 보고는 매료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큰 키에 큰 얼굴로 눈썹이 수려하고 수염은 적어 옛날 사람 같은 풍채가 있다. 본성이 술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잘 땐 코를 세게 골았고, 서양금西洋琴을 타면서 사람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들었다. 호탕한 이야기와 웅장한 변론으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고, 신령한 풍채가 늠름해 용과 호랑이를 잡고, 호랑이와 범을 치는 기상이 있다.
       지난 밤 나는 연암과 함께 지구와 해, 달, 별들이 자전하면서 운행하는 것과 사해四海와 육합六合, 팔황八荒의 요활遼闊함에 대해 논했다. 그 이론이 새롭고 신기하고, 크고 넓어서 앞 시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봤으니 오히려 위대하지 않은가? 비록 세상에는 내가 들었던 것보다 다른 것이 있지만, 그는 보잘 것 없는 것들[芻狗]의 밖에서 독특하게 초연한 것을 보고 아름답게 여겼기에, 마침내 그 말을 기록해 서술한다.
    ―본문 449~450쪽, ‘「서관문답서」’ 중에서

  • 책소개 작가소개 목차 미디어서평
  • 노이점

    노이점(盧以漸, 1720~1788)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홍士鴻, 호는 추산楸山이다. 1720(숙종 46)에 무과 출신 노언준盧彦駿의 둘째이자 서자로 태어났으며, 족형인 노이형盧以亨에게 글을 배웠다. 1756(영조 32)37세의 늦은 나이로 병자식년사마시丙子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해, 이후 장릉참봉長陵參奉과 한성부의 서부봉사西部奉事를 역임했다. 1780(정조 4)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맞이해 조선에서 보낸 사절단인 사은겸진하사행謝恩兼進賀使行의 일원으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사행使行에 참여했다. 수사록隨?錄은 당시 그의 연행의 기록이다.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와 시를 주고받았으며, 몽고인인 박명博明과도 교류하였다.

    김동석

    속리산을 지척에 둔 충북 보은 출신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수사록 연구,열하일기와 비교의 관점에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열하일기를 비롯해, 18세기 외교 사절로 청나라에 파견 다녀온 조선사신들의 중국 여행기(연행록)들에 주목하며, 당대 동아시아 문명문화 교류의 지형을 꾸준히 연구해 왔다. 오랜 기간 베이징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학자로 지내며, 가까이서 중국의 실체를 보고 듣고 느꼈다. 주요 논문으로, 열하일기의 인물 형상화 수법, 수사록과 기타 자료를 통해 읽어 보는 열하일기, 조선 후기 연행록의 미학적 특질, 일제강점기 때 소개된 연암 저술등이 있다.

     

     


  • 책소개 작가소개 목차 미디어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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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펴내며 
    해제_『열하일기』의 행간을 채우다, 『수사록』
    일러두기


    1. 한양에서 압록강까지 |5월 25일에서 6월 24일|
    2. 강을 건너다 |6월 25일에서 7월 9일|
    3. 심양에서 |7월 10일에서 7월 14일|
    4. 산해관에 들다 |7월 15일에서 7월 23일|
    5. 고국이 떠올라 |7월 24일에서 7월 30일|
    6. 북경 생활 |8월 1일에서 9월 16일|
    7.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 |9월 17일에서 10월 27일|


    ㆍ 의주에서 연경까지 노정의 기록
    ㆍ 박명에게 주는 편지
    ㆍ 서관문답서
    ㆍ 반선에 대한 이야기


    수사록 원문
    참고문헌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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