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를 잇는 ‘제2의’ 《북학의》
이 책은 지금껏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또 한 명의 조선조 북학파 지식인 이희경(1745-1805 이후)이 쓴 ‘연행燕行 체험기’다. 그는 다섯 차례 중국에 다녀온 북학파로, 이른바 ‘연암그룹’의 핵심인물이었으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북학의北學議》를 쓴 박제가(1750-1805)와는 절친한 벗이기도 했다. 청조淸朝의 선진 문화를 호흡한 이희경이 자신의 체험과 견문지식을 토대로 트인 시야와 국제적 안목을 통해 저술한 이 책은 내용상 《북학의》와도 많이 닮아 있으며, 어떤 항목은 그보다 더욱 진전된 내용도 담고 있다. 이 점에서 이희경의 《설수외사》는 또 하나의 《북학의》라 불릴 만하다.
:: ‘이용후생利用厚生’과 ‘편리민생便利民生’의 논리로, 시대가 바라는 참실용의 방향성과 비판정신을 가지다
이 책에는 수레·선박의 이용, 농기구의 개량 등 당대 이용후생학파가 주장하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당대의 농·공·상업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실천적 지침들’이었다. 이희경은 백성들이 실생활에 이용하기 편리한 것이면 무엇이든 기록해 두었다. 특히 “농사라는 것은 천하를 다스릴 때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라 강조하고, 그와 관련된 수레 제도의 개량과 그의 적극적인 사용을 주장했다. 또한 책의 일정 부분을 할애하면서 다양한 농기구들과 그 ‘적실한’ 사용법들을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주거 환경의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벽돌 제조법과 가마의 운용법, 지붕 이는 법, 그리고 채소를 재배하고 누에치는 방법 등 농민의 일상과 관련된 것에서부터, 종이와 붓·먹 등을 비롯하여 사대부의 일상에 필요한 것은 물론, 나아가 국가적 사업에 이르기까지 이용후생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두루 기록해 놓는다.
이러한 ‘편리생민便利生民’의 논리는 이희경이 지향한 이용후생의 학문정신을 집약한다. 실제로 그는 이 책에서 민생을 불편하게 하는 조선의 제도와 기술의 낙후성에서부터 기술 문명의 편리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회 인식까지 자신의 비판적 시선과 논리를 확장시키고 있다.또한 서출이었던 그는 다른 글에서 부당한 신분제도에서 오는 인재 등용의 모순을 강하게 토로한 바 있다. 이러한 불만을 사회 문제로까지 전환시켜, 청조의 선진 기술에 주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적극 활용하지 못하는 조선 사회의 낙후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처방전까지 포괄하여 놓는다.따라서 이 책은 매우 ‘실용적인 기획’을 바탕으로 한다. 결코 책상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당시 조선 사회에서 실현 가능했던 현실적인 대안들을 모은 것이다. 즉 그의 이상과 처방전은 낙후된 조선을 이용후생으로 ‘경장更張’하려는 야심찬 기획을 내비치고 있는 셈이다.
:: 북학의 소이所以, 경장更張의 야심
이 책의 ‘다섯 번 중국을 드나든 사연’의 장에서 이희경은 자신의 연행과 북학을 비아냥거리는 이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친다. 그들은 반청의식과 존명의리를 배후로 하는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젖은 이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희경의 반론은 명쾌하다. 그들은 전통적인 화이관에 기대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라 일축해 버린다. 이어서 이희경은 자신이 직접 목도한 청조의 선진 문물과 새로운 학술 풍조, 그리고 선왕의 유풍을 계승하여 빛나는 문명을 구축한 청조 문화를 근거로, 기왕의 화이관과는 정반대의 논리를 펼치며 평소 자신의 북학 논리로 대응한다.요컨대 명나라를 몰아 낸 청나라는 단순히 ‘지나가는 길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이희경의 논리다(만주족은 본디 유목민족이다!). 무엇보다 대갓집을 차지한 자도 남겨진 예전의 법도와 제도의 우수성에 놀라고, 자신들도 이러한 법도와 제도가 있는 줄 미처 몰랐지만 이를 편안하게 여기며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청조가 예전 중화의 선진 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아 계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박지원이 《북학의》 서문에서 “그 법이 비록 이적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본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천명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제 중화는 비록 만주족이 다스리고 있지만, 선왕의 법은 물론이며 이전의 문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후생을 통해 적극적으로 북학을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이희경은 선왕을 배우기 위해 청조를 배워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지만, 이는 기실 그 내면에 ‘북학의 당위성’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다. 이희경은 당시 세계적인 문화 수도였던 연경 체험을 통해 ‘거대한 타자’였던 청나라의 선진 문명을 누구보다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앞선 청조 문화의 우수성과 이를 적극 수용하기 위하여 ‘북학’을 구상하고, 이를 《설수외사》에 자세하게 담아 놓았다. 요컨대 이희경은 더 나은 기술과 선진 문화를 수용하여 낙후된 자국을 ‘경장更張’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한 것이다. 사실 이희경이 청조 문화의 선진성을 수용하려는 의지는 확신에 가까울 정도다. 이희경이 오랜 기간의 연행에 그치지 않고, 꿈에서나마 연행을 지속하고자 한 것도 오직 북학을 현실화시켜 자국의 현실을 바꾸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연행과 연행의 공간은 이희경 사유의 배후였고, 학문적 성과를 낸 자양분으로 작용한 것이다.
:: 여행길에서 만나는, 18세기 중국의 풍경
이희경은 단순한 방문객이 아니라 섬세한 관찰의 각도를 가진 여행자였다. ‘여행기’로서《설수외사》를 읽는 또 다른 매력이 여기서 발생한다. 그는 벽옹?雍을 답사하며 그 웅장한 풍광 앞에 시를 올린다. 실용의 관점에서 중국 여인들의 패션 감각을 스케치하면서 조선 여인의 예복에 관해 비평적인 코멘트도 남긴다. 그리곤 ‘춤추는 호랑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명의 구경꾼으로 나서 중국의 재미난 저잣거리 풍경을 싣기도 하며, 만리장성의 누대에 올라 그 장관 앞에 또 한 수의 시를 올리기도 한다.
■ 지은이 |
이희경李喜經(1745-1805 이후)
다섯 차례 중국에 다녀온 북학파로, 이른바 ‘연암그룹’의 핵심인물이다. 박제가(1750-1805)가와는 절친한 벗이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연암 박지원(1737-1805)을 스승으로 모시고, 연암의 이용후생과 북학의 사유를 이어받는다. 특히 서얼에다 포의布衣 신분으로는 드물게 다섯 차례나 연행燕行을 하였고, 청조의 문화와 그 학술적 흐름에도 조예가 깊었다. 더욱이 20여 년에 걸친 연행 체험은 그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이용후생의 논리와 사유를 한층 예리하게 만든 바 있다. 청조의 선진 문화를 호흡한 그가 연행 체험과 견문지식을 토대로 트인 시야와 국제적 안목을 통해 저술한 성과가 바로 이 책 《설수외사雪岫外史》다.
■ 옮긴이 |
진재교 외
진재교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강민정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박재영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이정원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이봉순 한국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 번역위원
하현주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 본문 수록 전각 이미지 |
양성주(서예가·전각가)
다섯 차례나 중국을 다녀온 북학파로 이른바 '연암그룹'의 핵심인물이다. 박제가(1750~1805)와는 절친한 벗이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연암 박지원(1737~1805) 스승으로 모시고, 이용후생의 정신과 북학의 사유를 이어받는다. 특히 서얼에다 포의布衣 신분으로는 드물게 다섯 차례나 연행燕行을 하였고, 청조의 문화와 그 학술적 흐름에도 조예가 깊었다. 더욱이 20여년에 걸친 연행 체험은 그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이용후생의 논리와 사유를 한층 예리하게 만든 바 있다.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책을 옮기며
일러두기<설수외사雪岫外史>설수외사자서雪岫外史自? 섭생론攝生論 인과응보因果應報 벼락 맞은 정녀貞女 돌에 얽힌 불가사의 묵장거사墨莊居士 휘파람의 대가들 중국에서 지붕 이는 방법 다섯 번 중국을 드나든 사연 건륭석경乾隆石經 화장火葬의 유래 장서藏書 법과 통치 조선 여인의 예복禮服 전족纏足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 호랑이 길들이기지리서는 국가 기밀 말 따로 글자 따로 시는 노래 중국의 발음과 조선의 발음 중국의 가축 수레바퀴의 통일 수차의 이용 만리장성과 황성皇城 도구 제작의 기본 법칙 도량형의 통일 도성의 구획 벽돌 농사는 천하의 근본 누에치기 비단에 무늬 놓기 농기구 채소 심는 법 곳간과 예의염치 도자기 중국의 옻칠 종이[紙] 붓[筆] 먹[墨]
<부록>
설수외사 원문
해제_조선의 경장更張을 기획한 또 하나의 ‘북학의北學議’-<설수외사雪岫外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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