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자학적 경학을 기반으로 한 경세학으로 18세기 조선후기 실학의 융성을 이끌어낸 선구자 박세당 연구서
1. 박세당은 어떤 사상가인가?
조선후기의 탈주자학(脫朱子學)의 태동과 실학(實學)의 등장은 시대적 추이이자 요구였다. 오랜 세월 동안 민중들에게 삶의 이치와 사회생활에서 도덕적 질서의 바탕이 되어온 주자학은 그 본래의 순수성을 상실해가면서 권위주의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 그 벽을 넘는 데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었다. 주자학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탈주자학들의 사상적 승리에서라기보다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중국의 명청(明淸) 교체기 등의 국제 정치적 변화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주자학적 모순을 갈파하여 우리 실정에 맞지 않은 사상적 약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는 철학적 반성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탈주자학의 경향은 사상적 주류인 주자학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약 그런 비판 운동이 보수적 사상과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유교 해석이 가능했었다면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강요당하는 굴욕을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중화사상(中華思想)과 주자학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변화를 강요당한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의 사상적 혼미는 가중되었던 것이다.
탈주자학적 사상은 말할 나위조차도 없이 오늘의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의미 있는 것이다. 17세기 탈주자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은 서인(西人)들이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분당되었을 때 소론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관리로서 현종(顯宗) 때 10여 년 봉사하고 주로 재야에서 농사와 경전 연구에 종사했지만 그 영향력은 참신하고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사상가였다. 그는 권력을 떠나 초야에서 은인자중하고 살았으면서도 본인의 뜻과는 달리 노론의 보수적 학자들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공격받기도 했고, 때로는 대의명분을 거스르는 요사한 다섯 인물 곧 오사(五邪)라고 낙인찍히기도 했다. 여기에서 공격을 한 입장이 오랜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주자학적 입장이라고 한다면, 박세당은 그 반대의 탈주자학적 비정통적인 인물로 공격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이와 같은 가열찬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비록 재야에 있었지만 그만큼 영향력을 가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박세당의 사상적 특징은?
박세당의 사상은 크게 경학과 경세학으로 구분된다. 그의 경학은 우선 주자학적 관념론에서 현실적 경험론으로 넘어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자면 천(天)에 대한 견해는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천리(天理)라는 이해로부터 벗어나 다양한 개념을 제시한다. 위로는 적극적인 상제적(上帝的) 절대자적 의미로의 해석에서부터 현실적 과학적 의미로, 그리고 거기에 부응하는 현실 존중과 민본적 사고 체계로 전위되는 특색을 엿볼 수 있다.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였던 이기철학(理氣哲學)에서도 당연히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며, 절대주의가 아닌 상대적 진리관은 이미 노장철학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유래된 경학관의 일면일 것이다. 그의 경세학은 <색경(穡經)> 이외에는 특별한 저술이 없기는 하지만, 상소문(上疏文), 서간문(書簡文), 비문(碑文) 등에서 실학적 경세관을 읽을 수 있다. 봉건주의적 군주 중심에서 벗어나 민본사상을 주장하고, 신분의 평등과 노동의 중시 그리고 현실적 개혁을 주장하는 실학적 경향으로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현실에 대한 중시는 주자학에서 주장하는 왕도정치에 기본을 두는 것이지만, 인간의 욕망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긍정하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실용적인 것을 존중하여 농업기술을 연구함은 물론 여러 제조기술을 통한 과학 중시와 실무 중시의 실천적 가치 존중에서 그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원광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문학석사, 철학박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윤리학(석사) 동국대학교 불교철학(문학사), 현재 광주대학교 교수 현재 광주대학교 호남전통문화연구소 소장, 현재 아시아문화교류재단 이사 현재 한국공자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