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생명관의 탐구, 중층하는 위기 속에서 이 책은 스즈키 사다미가 지은『생명관의 탐구: 중층하는 위기 속에서』(生命観の探求―重層する危機のなかで, 作品社, 2007)를 바탕으로 다시 편집하고 번역한 한국어판이다. 저자의 두 제자가 번역하여 이 책의 원 의미를 더 생생하게 담고자 고심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생명’이라는 관념이 근대 이후 어떤 방식으로 과학적·철학적·문학적·정치적 사유 속에서 부상하고 변주되어 왔는지 다룬다. 이를 일본 내부의 사상사에만 가두지 않고, 국제적이면서도 장기적인 흐름 속에서 다시 배치해 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오늘날 생명과 기술, 데이터와 정책이 서로 얽히며 새로운 질문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만큼, 우리나라 독자들도 이 책을 동아시아적 경험과 세계사적 사유를 함께 가늠해 보기 위한 하나의 좌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인의 생명의식은 죽음과 함께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이라는 관념은 죽음조차 가볍게 넘어선다. 관념뿐만 아니라, 우주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실감할 수 있다. 끝이 없는 이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대체 불가능한 생명의 소중함 또한 느낄 수 있다. 그 지점에 ‘생명’의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이 세상에 생명만큼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없다. 그것은 모든 생명이 깃든 거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생명’이 단지 아름다운 슬로건이 아니라—지식과 제도, 상상력과 책임의 배치 속에서— 거듭 되물어야 할 문제임을 함께 확인해 주길 바란다.
‘생명’이라는 말이 지나온 길을 옮기며 우리 독자들에게 저자 스즈키 사다미의 이름은 아직 익숙하지는 않다. 일본 근현대 문예와 사상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다이쇼 생명주의’라는 문제 틀을 제기한 학자로 알려졌지만, 그 이름이 일반 독자에게 널리 회자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스즈키 선생이 생명주의를 연구한 것은 단지 과거의 사조를 대상으로 삼은 객관적 연구의 결과만은 아니다. 그는 전시기 일본문학의 사상적 배경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생명’이라는 키워드에 도달했지만, 동시에 1970년대 일본 문예비평과 시론 속에서도 생명중심주의가 여전히 살아 있었음을,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 흐름의 한복판에서 감응하고 있었음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해 그의 연구는 대상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연구인 동시에, 자기 안에 이미 들어와 있던 시대의 감각을 역사화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이 책 『생명관의 탐구』는 단순히 ‘생명’이라는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를 논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 얼굴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 말이 얼마나 쉽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를 추적한다. 생명은 개인의 존엄을 떠받치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나 민족을 하나의 유기체로 상상하게 만드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생명은 인권의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개인을 더 큰 집단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논리에도 동원될 수 있다. 생명의 이름으로 인간을 구하려는 사유와, 생명의 이름으로 개인을 국가와 민족에 종속시키는 사유가 같은 시대의 언어 속에서 자라난다. 스즈키 선생의 사상사적 감각은 바로 이 불편한 동시성을 놓치지 않는다.
생명과 인권, 진화론 이번에 한국어판 제1권으로 묶인 내용은 그 긴 탐구의 입구에 해당한다. 부제에 붙인 “생명의 발명, 진화론은 어떻게 인권이 되었나”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제1권에서 ‘생명’이라는 말이 근대 일본에서 어떻게 ‘발명’되었는지, 다시 말해 새로운 사상적 기능을 부여받았는지를 보게 된다. life가 ‘생명’으로 옮겨지고, ‘이노치’, ‘성명’, ‘인생’ 같은 말들과 겹치고 어긋나면서 근대적 의미를 획득해 가는 과정은 단순한 번역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동아시아가 서구 근대의 자연권 사상, 기독교적 인간관, 생물학, 진화론, 사회진화론, 국가론을 받아들이며 자기 언어 안에서 다시 조립해 간 과정이기도 하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수용’을 결코 단순한 모방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외래 사상은 텅 빈 그릇 속으로 부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언어, 감각, 제도, 기억, 욕망을 통과한다. 스즈키 선생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리셉터’라는 말을 사용한다. 어떤 사상이 일본에 들어올 때, 그 사상은 유학, 불교, 신토, 양명학, 석문심학, 천도사상, 막말·메이지기의 정치적 긴장, 지식인의 언어 습관 같은 기존의 장치를 통과한다. 그 과정에서 선택되고, 오해되고, 변형되고, 때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증식한다. 따라서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서구 사상이 일본에 들어왔다’는 평면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번역과 수용의 현장에서 사상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가 하는 훨씬 복잡한 장면이다.
제1권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생명’과 ‘인권’과 ‘진화론’의 관계다. 일본국헌법 제11조에서 기본적 인권이 “부여된다”고 할 때, 그것을 부여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미국 독립선언에서 말하는 조물주인가. 유럽의 자연법인가. 유학의 하늘인가. 아니면 전후 일본 사회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 공백인가. 스즈키 선생은 이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아, 메이지 일본이 천부인권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시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을 통해 그것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추적한다. 이 책은 여러 사상가들이 서양의 개념을 어떤 전통적 리셉터를 통해 이해했는지, 그 결과 자유와 평등, 권리와 생명, 국가와 사회의 관계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묻는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재직. 오사카대학에서 일본 귀환자 문학을 소재로 표상문화론을 전공했고, 현재 다양한 동아시아 비교문화사에 관심을 두고 연구 중이다.
도쿄대학(東京大学)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창작, 평론, 편집 업무에 종사했다. 이후 도요대학(東洋大学) 문학부 교수를 거쳐, 인간문화연구기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 및 종합연구대학원대학 문화과학연구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양 기관을 정년퇴임한 이후 명예교수로 취임하였다. 문화적 개념과 장르의 편성사라는 연구 주제로 고전 평가사를 포함한 일본 근현대 문학사의 재구성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역사와 생명-니시다 기타로의 고투』(歴史と生命―西田幾多郎の苦闘, 2020), 『일본인의 자연관』(日本人の自然観, 2019), 『근대의 초극-그 전전・전중・전후』(近代の超克―その戦前・戦中・戦後, 2015), 『「일본 문학」의 성립』(「日本文学」の成立, 2009), 『생명관의 탐구—중첩하는 위기 속에서』(生命観の探究―重層する危機のなかで, 2007) 외 다수가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일본문예비평으로 석사, 일본 종합연구대학원대학에서 근대일본사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동아시아인문융복합연구소에서 교수로 재임 중이다. 일본을 토대로 동아시아 근대의 지(知)와 개념의 재편성에 관해 개념편성사 연구를 진행해 오고 있다. 주요 연구로는 「시베리아출병이라는 트라우마가 가져다준 ‘인재’: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전사」(2024), 「《플루토》가 보여주는 ‘착시’ 세계: 로봇이 상상한 미래 사회의 메타포」(2024) 등이 있으며, 『재일문학이 그린 재일코리안』(2021)의 저서를 포함해 자이니치의 정신사(공역, 2016), 생의 철학: 제국을 내파하는 아나키즘(공역, 2024) 등 다수의 역서와 편서가 있다.
동아시아미래가치연구소 학술총서 시리즈 〈지성 오디세이〉 발간사
불확실성의 안개를 뚫고 나아가는 지적 항해
한국어판 서문
서장 새로운 생명관이 요구되고 있다
1. 왜 생명관인가
2. 지구환경문제를 둘러싸고
3. 생명관의 동요
4. 포스트 냉전
5. 생존의 권리란 무엇인가
6. 사람의 목숨은 지구보다 귀중한가
제1장 인권사상과 진화론의 수용
1. 일본국헌법 제11조
2. ‘생명’이라는 단어
3. 기독교와 과학사상의 수용
4. 자유와 평등의 수용
5. 자유민권 사상의 전개
6. 가토 히로유키의 전향
제2장 생물학의 생명관 ― 20세기로
1. 생물학적 생명관—세포설과 진화론
2. 다위니즘과 스펜서 철학
3. 헉슬리의 상호부조론
4. 창조설의 뿌리 깊음
5. 중국의 진화론 수용
6. 진화론 수용의 일본적 특징
7. 기계론을 둘러싸고
8. ‘기계론 vs 생기론’의 도식
9. 헤켈의 생명일원론
10. 생명일원론의 철학적 기반
11. 국가, 사회와 생명관
역자 후기
‘생명’이라는 말이 지나온 길을 옮기며
인명 정리
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