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
- 김수영, 「시작(詩作) 노트」, 1966
김수영의 이 말은 번역의 중요성을 명쾌하게 보여 준다. “내 시”, “내 번역”이라는 1인칭으로 되어 있지만, 번역과 창작이 연동하는 문제가 단지 김수영 문학만의 특징일 리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일찌감치 다양한 문인들에게서 나타나던 일관된 현상에 가깝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전혀 다른 행위로 구획되어야 할 ‘번역’과 ‘창작’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인식 틀 자체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번역의 어려움을 창작에 빗대어 말한다. 근대의 문인들 다수는 별 거부감 없이 이 둘을 나란히 두고 있었다.
이 책 『한국근현대번역문학사론 — 세계문학·동아시아·중역』의 관심 역시 번역문학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번역과 창작은 연동되어 있었다. 번역은 그 자체가 한국문학장을 구성했던 자원이자 새로운 창작 경향을 추동한 촉매였다. 문학에 영향을 준 번역 대상이 문학 작품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지식, 이론, 사상 등 통상적 의미의 문학 바깥으로부터 왕성하게 번역된 텍스트들 역시 새 시대의 새로운 정신을 진작시켰다. 이 텍스트들은 다양한 세계문학과 더불어 번역의 총체를 형성했고, 그 총체가 결국 한국문학의 갱신과 확장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므로 번역문학은 한국근현대문학사의 시작부터 변함없이 그 안에 있었던 고토(故土)다. 이 책은 그 오래된 땅의 역사적 의미를 파헤쳐, 그것이 한국문학의 핵심적 문제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탐색한 성과들의 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미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우리는, 특히 번역 대상이 된 ‘세계문학’에, 비교항을 내재한 번역장으로서의 ‘동아시아’에, 그리고 식민지적 사정을 반영한 번역 방식으로서의 ‘중역(重譯)’에 주목하였다.
● “번역의 힘든 것이 실로 창작 이상의 어려운 것이다”
1920년 주요한은 “번역의 성행”이 우리 문예의 발달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논지를 전개하며 “번역이라면 일반이 멸시하지만 번역이란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어떤 때는 창작보다도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창조』 7)라고 강변한 바 있다. 동시대에서 비슷한 발화자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번역의 힘든 것이 실로 창작 이상의 어려운 것인 줄 압니다.”(『개벽』 25, 1922)라고 한 현철, “누구나 번역이라는 일을 하여 본 이는 다 아는 바와 같이 번역이라 함은 원래 창작보다도 어려운 일이외다.”(『반역자의 모(母)』, 1924)라고 한 신태악, “시의 번역이라는 것은 번역이 아닙니다. 창작입니다. 나는 창작보다도 더한 정력 드는 일이라 합니다.”(『잃어진 진주』, 1924)라고 한 김억 등이 여기 해당한다.
그 문인들이 창작 이상의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번역의 시간을 축적해나갔던 이유는 결국 주요한이 말한 “우리 문예의 발달”이라는 방향성을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유했기 때문이다. 형형색색의 번역물을 남긴 이들이 다름 아닌 한국근현대문학사의 주역들, 이를테면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 진학문, 전영택, 조명희, 황석우, 김억, 김명순, 김일엽, 염상섭, 변영로, 홍난파, 방정환, 김동인, 김광주, 양건식, 현진건, 주요한, 홍사용, 이상화, 김동환, 박영희, 최서해, 박종화, 주요섭, 김소월, 나도향, 정지용, 노자영, 양주동, 김기진, 김진섭, 이익상, 김형원, 최승일, 박화성, 오천석, 송영, 이태준, 박용철, 조춘광, 이헌구, 정인섭, 강경애, 이주홍, 이효석, 임화, 최재서, 김유정, 박태원, 함대훈, 노천명, 백석, 이하윤, 김사량, 김수영, 김남주 등이었다는 점이 이를 잘 뒷받침한다. 개개인의 실천 방식이나 작업량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에게 번역과 창작은 ‘조선 문예의 발달’을 지향한 도정 위에 함께 붙박혀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번역과 창작을 넘나든 그들이었기에 ‘번역이 창작보다 어렵다’고 토로할 만한 온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둘을 자연스럽게 비교하는 인식 틀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한국근대소설 및 동아시아 비교 문학 전공. 대한제국기의 지식 수용, 한국근대문학과 번역의 관계, 동아시아의 애국 담론 등을 연구해왔다. 주요 저서로 『근대문학의 역학들 –번역 주체 · 동아시아 · 식민지 제도』(2019), 『중역(重譯)한 영웅 – 근대전환기 한국의 서구영웅전 수용』(2023), 『대한제국과 콜럼버스』(2023) 등이 있다.
연세대학교 글로벌인재학부 교수. 한국근대시 및 비교문학 전공. 김억을 시좌로 삼아 한국근대시와 번역의 관계 등을 연구해 왔다. 주요 저서로 『한국근대시의 이상과 허상』(2008), 『유성기의 시대, 유행시인의 탄생』(2013), 『『오뇌의 무도』 주해』(2023) 등이 있다.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현대비평, 비평이론, 동아시아론, 비교문학, 현대사상 등을 연구 분야로 삼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어바인), 프린스턴 대학교, 일본 조사이 국제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했다. 주요 저서로 『벌레와 제국』, 『프랑켄 마르크스』,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 『개념과 역사, 근대 한국의 이중어사전』(전 2권, 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는 『근대어의 탄생과 한문: 한문맥과 근대일본』, 『미주의 인상』(공역) 등이 있다.
서문
Ⅰ 번역, 한국 근대문학의 원천
〈번역, 한국 근대문학의 원천〉을 열며
‘문화번역’-‘번역문화’-‘언어・문화번역’ 그리고 ‘론’ : 조재룡
타자의 시대정신과 상상력 : 박진영
새로운 혹은 다른 문학사의 구상과 한국근(현)대시 연구 : 구인모
중역(重譯)의 죄 : 손성준
Ⅱ 번역의 조건과 언어의 경계
〈번역의 조건과 언어의 경계〉를 열며
한글전용과 한국문학사 : 임상석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적 현장과 개신교선교사 : 이상현
일본 유학생 문인의 문학 활동과 상징주의 : 이종호
살아있는 ‘불령선인’의 일본어 말하기 : 정한나
Ⅲ 토대로서의 중역과 동아시아
〈토대로서의 중역과 동아시아〉를 열며
해적, 제국, 망명 : 윤영실
번역과 문범(文範) 기획 : 김미연
동아시아 지형 속 기독교 출판을 통한 번역문학의 유통과 중국이라는 매개항 : 김성연
동아시아의 프랑스 ‘근대시’ 수용과 번역 : 김준현
근대기 한국의 보들레르 시 번(중)역과 그 함의 : 구인모
Ⅳ 세계문학과 식민지 번역장
〈세계문학과 식민지 번역장〉을 열며
혁명의 번역과 식민지 사회주의 : 권보드래
세계문학의 번역과 복수의 저본들 : 손성준
‘세계적 베스트셀러’ 『엉클 톰스 캐빈』의 수용과 서사 체험 : 김미지
세계문학과 프로문학의 이름으로 : 이용범
Ⅴ 냉전과 번역
〈냉전과 번역〉을 열며
냉전텍스트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I Chose Freedom)』의 동아시아 번역과 한국 수용의 특징 : 이봉범
지연된 혁명 : 박지영
공산주의에서 ‘미제 사회주의’로 : 최진석
냉전기 지역문학 형성의 한 경로 : 유석환
중역과 혁명, 비상시의 세계문학과 그 사명 : 황호덕
초출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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